퍼플 람보르기니
[리츠레이] 라일락정원 0






* 리츠x시력 상실 레이겐

* 10년 후






01


끔뻑이는 눈동자가 이따금 초점을 잃어버리고 바깥으로 나돌 때, 그러니까 처음 아라타카가 통증을 호소했을 때에는 그저 가벼운 꾀병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라타카 스스로도 눈을 부비며  가볍게 툴툴거리기만 할 뿐이었단 말이다. 혹시 눈병에라도 걸린 거 아냐? 에쿠보가 물었을 때 아라타카는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가 봤어. 근데 별 다른 이상 없다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뭔가 악령이라도 씌인 것 아닐까. 의사가 이상 없다고 하니 뭐 그런 거겠지. 시게오는 스승님의 억측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예의 그 자신만만한 자신감은 그대로였기에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다. 언젠가는 괜찮아지시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스스로 왜 그 과정에 동의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만큼 가벼운 일처럼 보였기에, 무언가 손을 쓸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었던 탓이다.


아라타카의 통증은 느릿하지만 제법 속도감 있게 퍼졌는데, 그가 이따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드문드문 뱉기 시작한 것이 가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처음 말이 나온 뒤 고작해야 한달 만이다. 낙엽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였으니 아마 맞을 테다. 시게오나 에쿠보는 슬금슬금 레이겐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벌겋게 부어 있는 눈두덩이를 어찌할 줄 모르고 부벼대는 아라타카의 모습이 제법 심각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게오의 경우는 스승님에게 씌인 악령은 보이지 않는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했으나 그 정도로 스스로에게 관심을 쏟기에 아라타카는 원체 무심한 사람이었다.


리츠는 그들보다 뒤늦게 레이겐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순서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리츠와 레이겐은 사적으로 만날 만큼 친근한 사이도, 그렇다고 그렇다 할 용건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리츠는 그가 뒤늦게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약간은 분개했는데, 소외되었다는 기분 탓이었다. 무엇에서? 아마도, 형에게 중요한 사람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에서일텐데, 리츠는 지금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의 감상을 내놓았다. 레이겐 씨의 소식이라 그랬다. 그래서 분했다. 억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의도치 않게 관계성의 우위를 차지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만약 마침 그 때 그가 그 곳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결코 없었을 일이다.

방과 후에 형을 찾아 영등등 사무소에 찾아갔을 때, 레이겐이 눈두덩이를 감싸쥐고 끙끙 앓는 모습을 의도치 않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리츠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몸을 숨겼다. 진통제를 찾는 손이 책상 위를 더듬으며 덜그럭대는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손 안으로 잡히는 건 없었다. 약통이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며 알약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츠는 다급함을 애써 감추고 영등등 사무소로 들어갔지만, 아라타카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리츠는 아라타카가 책상 위에 쏟아진 약을 겨우겨우 주워먹고 엎드린 채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이고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 있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뒤늦게 고개를 든 아라타카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 모브 동생 왔냐?" 하고 묻는 말에 "형은 어디 갔죠?" 하고 반문하는 것 뿐이었다. 나 방금 당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그리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 이후로 리츠는 시게오에게 넌지시 묻곤 했다. 레이겐씨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시게오는 그 말에 동조를 표하면서도 아마 그리 심각한 건 아닐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리츠로서는 시게오가 그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아라카타는 시게오 앞에서 아픈 티를 결단코 내지 않았겠지. 진통제도 숨겨둔 것을 보면 억지로 멀쩡한 척 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이 생활하고, 그러다 진통이 찾아오면 눈을 끔뻑거리며 휘청대고. 리츠는 그가 왜 그렇게나 아라타카를 신경쓰고 있는지, 그 사실에 대해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대개 영등등 사무소에 가지 않았기에 아라타카의 소식을 그 때 그 때 전해들을 수 없었다. 리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을 닥달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서 흠칫 놀라곤 했다. 그는 그저 시게오가 보지 못했던 아라타카의 고통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02


스승님이 사라졌어.


시게오의 표정은 제법 평온했다. 아무래도 잠시 어딘가 말 없이 다녀올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레이겐은 여태 그런 적이 없었다. 시게오의 표정은 늘 그랬듯 담담했다. 별 다른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리츠는 그렇구나, 하고 대꾸했으나 그는 직감했다. 레이겐은 영영 떠난 것이다. 어쩌면 정말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레이겐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으니 이유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리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시게오보다 아라타카에 대해 유일하게 더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작은 비밀. 그의 형에게 레이겐 아라타카는 소중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는 부러 그가 알고 있던 사실을 숨겼다. 어린 날의 치기였다. 내가, 아주 조금 더, 작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노라고.


리츠, 스승님은 돌아오시겠지?

그럼.


리츠는 그의 말이 확신에 찬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시게오는 그의 말에 왠지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리츠는 누구에게나 신뢰를 얻을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시게오에게는 더욱이. 동생을 믿는 눈에는 한치 망설임이 없었고, 리츠는 그 눈동자를 배반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역시 말하고 싶지 않아. 레이겐 씨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이라면, 마지막을 간직하고 싶었다.




03


한 달이 지났다.


리츠의 예상대로 아라타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등등 사무소의 영업이 완전히 끝났다. 시게오는 이따금 사무소에 들러 아라타카가의 흔적을 찾는 듯 보였으나 그것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리츠는 그 때에서야 그가 숨겼던 일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시게오는 아라타카가 어느 상태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리츠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풀어놓을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리츠는 언젠가 있었던 그 날처럼 몰래 영등등 사무소에 다녀왔다. 돈이 체불되어 이제 다른 가게가 들어온다고 했다. 폐업 안내가 붙어 있는 문은 평소보다도 훨씬 허름해 보였다.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는 사무소에는 그것도 공백이라고 소박하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리츠는 그 와중에 레이겐의 책상 위에 뜬금없이 놓여 있는 라일락 꽃다발을 발견했다. 은은한 향과 함께 말라가는 꽃잎의 색이 바라 있었다. 그가 놓고 갔나. 난데없이 꽃은 왜 산 거지. 나무면 몰라도 한 번도 사무소 안에서 본 적 없는 것이다. 리츠는 그도 모르는 사이 꽃다발을 품에 숨겼다. 아무도 보는 이 없었으나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르니까. 리츠는 그가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아쉬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약간 무언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질어질,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는 겨우 숨을 골랐다. 아. 차가운 덩어리가 뺨에 내려 앉았다. 리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첫 눈이다. 얕은 진눈깨비가 라일락 꽃잎 위에 쌓였다. 바라고, 바란 꽃잎에.




04


1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10년이 아닌 이상, 그 다음 10년은 우습다. 시간이 시간을 삼키는 것처럼 물살은 더욱 거세어지고, 종국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 훨씬 빠르게 흘러 그를 앞질러 나가고, 결국에는 겨우 뒷꽁무니나 따라잡는 꼴이 된다. 리츠도 그랬다. 아라타카의 빈자리가 채 그를 서럽게 만들기도 전에 그는 교복을 벗었고, 세 번을 더 졸업했다. 시게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라타카를 찾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숨어버리신 걸까?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리츠는 상심하는 시게오의 옆에 앉아서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레이겐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은 도망친 거야.


그러니까, 10년이었다. 아라타카가 감쪽같이 사라진 지 10년이 되었다. 그는 아마 서른 여덟이 되었을 테고, 젊은 청년의 얼굴에 주름 하나 정도는 생겼을 지 모른다. 에쿠보야 늘 초록 콧물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주변은 많이 바뀌었다. 낮은 건물이 많던 주택가에는 이제 제법 높은 건물이 드문드문 들어서고, 그 곳에 자리하던 사람들의 얼굴 또한 바뀌었다. 리츠 스스로만 보아도 그랬다. 고작해야 160cm 언저리에 머물던 키는 훌쩍 커서 예전 그가 올려다보던 정수리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시게오도 동생 못지 않게 자라버렸다. 교복이 어울리던 어린 아이에서 어느덧 정장이 어울릴 법한 어른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운동화보다는 구두가, 책가방보다는 서류가방이.


리츠는 그의 형이 졸업하고서 드디어 그럴 듯한 직장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는 시게오가 혹여 그의 옛 스승을 따라 영등등 사무소를 차리지는 않을까 추측했지만, 의외로 시게오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테다. 리츠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아라타카가 도망치듯 사라진 이후에서는 속내를 완전히 터놓은 적이 없으니 리츠로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레이겐 아라타카라는 인간이 도대체 무어길래 이렇게나 오래 남아 흔적을 되새기게 하는지, 리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또한 그에 휘둘리고 있었으므로 해답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제일 나은 방법은 아라타카를 찾아내는 것이었으나 그로써는 방법이 없었다. 형의 스승은 영능력자가 아니었으므로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는 고작해야 평범한 인간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해서는, 보잘것 없는 사기꾼이었다고.


어쨌거나, 리츠는 형에게 적절한 축하의 선물을 줄 필요가 있었다. 시게오는 곧 쵸미시를 떠날 지도 몰랐다. 직장이 멀었던 탓이다. 리츠는 형에게 심심한 축하 전화를 끊은 직후 선물거리를 생각했다. 잘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의 형에게는 많은 것을 주었고, 앞으로도 줄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사회에 무난히 적응해나가는 시게오의 모습은 평생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게오의 옆에 아라타카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츠는 다시 차오르는 정체 모를 패배감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사랑하는 형인걸.


사실 진작에 이 곳을 떠났어야 할 사람은 리츠였다.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직장도, 작은 도시인 쵸미시 안에 머무르기엔 아까운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왜인지 부득불 쵸미시에 남았다. 그 작은 곳에 무슨 정이 있어서. 사실상 리츠의 인간관계는 그리 넓지 않았으므로 누군가를 위해 이 곳에 남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이유가 있었다면 시게오 정도였을 테다. 부모와의 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는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터무니 없었고, 기회를 희생하면서까지 쵸미시에 남을 것이라 결심할만한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리츠는 눈에 밟히는 작은 사무실을 생각했다. 사실상 그가 그리 자주 가보지도 않았던 장소였음에도. 그에게 영등등 사무소는 이젠,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듯 품에 안고 나온 생기 없는 라일락의 흔적이었다.


보랏빛 라일락.


리츠는 시게오에게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 보통은 들릴 일 없는 꽃집을 찾기 위해서는 제법 발빠르게 돌아다녀야 할 것이었다.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에 가까웠으므로 리츠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오랜 시간 한 동네 안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찾아 움직인다. 꽃집을 평소에 본 적이 없으니 아마 그의 걸음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곳에 가면 찾을 수 있겠지. 리츠는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는 대신, 그가 어렸을 때처럼 무작정 걷는 방법을 선택했다.


여기서 왼 쪽. 처음 보는 집이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 이제는 큰 길. 주욱 직진한다. 산에 가까운 골목길이다. 리츠는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았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감성적이 된 탓인가. 그러기를 한참, 콧가에 은은한 풀향이 스친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향긋함이다. 리츠는 홀린듯 걸었다. 누군가 보았으면 기묘한 광경이라 말했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꽃집이 나타난다. 정말 단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구석진 골목이다. 가로등 불이 꺼진다면 완벽히 어둠에 잠길 곳.


계십니까?


작은 구멍가게마냥 자리했음에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게는 서툰 흔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코를 간지럽히는 향내음은 그의 방 구석 어딘가에서 바스라졌을 꽃다발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리츠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문을 닫으려던 모양이지. 리츠는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면 나갈 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잠시만요…….


정말로 리츠가 떠나려던 찰나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츠는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다. 어디서 들었을까. 아니, 익숙하지는 않다. 익숙하다기보단, 그가 싫어하던 목소리에 가까웠다. 리츠는 어두운 가게 안쪽에서 종이 딸랑이는 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째서인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언젠가는 만나리라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또한 위선자였으므로.


무슨 꽃을 찾으시죠?


아.

그다.


리츠는 문득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는 사실을 변명할 수 없었다.

'fic > 모브사이코 1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리레이] 근무태만 上 *19  (0) 2017.05.18
[리츠레이] 라일락정원 3  (0) 2016.12.20
[리츠레이] 라일락정원 2  (2) 2016.12.10
[모브레이] 여행 조각글  (0) 2016.12.09
[리츠레이] 라일락정원 1  (0) 2016.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