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겐으로서는 에쿠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 사랑을 가르쳐 달라니.
가르쳐달라 함은 레이겐이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럼, 뭘?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뭔가를 가르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는 말 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고, 사람을 혹하게 하는 방법 정도는 꿰고 있었다. 그럴듯한 말을 하며 사람을 도닥이는 것 쯤, 실제로 그가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건 좀 다른 범위의 일이었다. 삶의 교훈을 달라는 거라면 차라리 할만 했다. 그거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정도의 논리만 있어도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사랑?
레이겐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사랑. 에쿠보를 슬쩍 곁눈질한 레이겐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포털 사이트에 짧게 검색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어쩌구. 아니고. 이게 사랑인가요? 이건 너무 감상적이다. 음. 괜히 마음의 짐이 얹어진 기분 탓인가 쓸모없는 걸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릴수록 원하는 답은 없었다. 죄다 고민 상담 뿐이다. 물론 이 정도 질문이라면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수준으로 쉽게 대답해줄 수 있겠지만.
에쿠보의 반응을 보아서는 뭔가 좀 다른 답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연애? 사랑의 정의? 어느 쪽이던지 그걸로 사람을 지배하겠다는 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단적인 예로, 연애는 일대일로 하는 것이지 수백 수천이나 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애주의자가 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에쿠보가 일종의 성자(聖子)가 되겠다고 할 것 같진 않았다.
레이겐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뭐가 어느 쪽이 되었던 지금 골이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괜한 걸 알겠다고 한 것 같은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별 것 아닌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하지 말자고 할까. 레이겐이 고민했다.
“오늘 더 할 일 있냐?”
레이겐이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닫는 순간, 나른한 얼굴로 소파에 늘어져 있던 에쿠보가 물었다. 레이겐이 흠칫 놀라다 큼, 헛기침을 했다. 저걸 묻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까 물은 것에 대답을 제대로 못 들었으니 이번엔 제대로 듣겠단 뜻이다.
“…있는데? 할 일이야 쌓였지.”
레이겐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되긴 했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판단해서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에쿠보는 한쪽 눈썹을 기울이며 한 쪽 입술을 말아 웃었다.
“어라, 그럴 리가?”
“무슨 뜻이냐? 기분 나쁘네.”
에쿠보가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레이겐이 인상을 푹 찌푸린다. 에쿠보는 눈을 슬쩍 감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쁜 척을 하려는 계획은 실패했다. 애초에 먹히지도 않을 거였지만. 레이겐이 따로 하는 일이 있을리가. 특히 다른 때라면 모를까 요즘엔 고작해야 바에 들르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없다, 왜.”
레이겐이 다시 고쳐 대답했다. 에쿠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나갈 채비를 한다. 아직 퇴근까지는 30분이나 남았는데. 레이겐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린다.
“일찍 퇴근하자고.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에쿠보가 자리에서 미적거리는 레이겐을 보챘다. 시게오 없다고 아주 신났구만. 레이겐이 생각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정리했다. 더 시간을 끌고 싶어도 그럴만한 꺼리도 없었다.
에쿠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비죽비죽 웃고 있었다. 진짜 본인 몸도 아닌 주제에 활용도가 높다.
“그래서, 뭘 하자고?”
흐음. 레이겐의 물음에 에쿠보가 고민하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뭐가 좋을까? 레이겐은 먼저 뭔가를 가르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이 편이 에쿠보의 계획에 더 가깝기도 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했다. 약간 다정해지면 된다. 들어주고, 시간을 보내고. 레이겐이 그에게 결국 기대게 되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모두 끝난다. 그 방법은 아주 많고도 다양했으니 에쿠보로서는 적당히 그것들을 활용해 목표를 이뤄내기만 하면 되었다.
“음. 뭐부터 시작을 하는게 좋지.” 에쿠보가 다시 한 번 고민하는 티를 냈다. 그리고서 나온 말은, “데이트?” 라는 가벼운 대답이었다.
레이겐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설마설마했더니, 진짜야? 조금 불안감이 묻어있던 표정이 급속도로 풀어진다. 이로써 레이겐은 에쿠보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사랑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겠다느니, 신이 되겠다느니 거창한 계획에 비해 그가 시작하는 짓은 가볍기 그지없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레이겐은 비실비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서 벗어두었던 자켓을 챙겨 입었다. 에쿠보는 벌써 그가 레이겐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에쿠보.”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한 레이겐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에쿠보를 먼저 쓱 지나쳐 앞장을 섰다. 레이겐이 슬그머니 에쿠보를 돌아본다. 방금 전까지 심각했던 표정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너 이거 핑계지? 사랑을 가르쳐달라느니 뭐니 해놓고 사실 나 좋아하는 거 아냐?”
레이겐의 물음에 에쿠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푸하핫. 레이겐이 이번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사무실 밖에 나올 때까지 그것은 멈추질 않았다.
굳이 이걸 부정을 해 줘야 할까. 에쿠보는 사무실 계단을 내려가며 고민했다. 그러나 굳이 그 점을 고쳐주려면 그의 실험 계획까지 전부 설명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레이겐이 상처를 받아 일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에쿠보가 생각했다. 레이겐은 유들유들 잘 휘어지는 인간인 척 굴지만 사실 굉장히 잘 부러지는 인간이다. 적어도 에쿠보가 어깨 너머로 보았던 레이겐은 그랬다. 함부로 건드려서 잘 진행 될 일을 그르칠 필요가 있을까?
레이겐은 에쿠보가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쿠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이걸 굳이 부정해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당히 비틀어 주는 것 정돈 괜찮겠지.
“그렇다고 이 몸이 너에게 부모된 사랑을 베풀 수는 없잖아.”
“뭐, 따지자면 그렇긴 하지.”
에쿠보의 말에 레이겐이 눈동자를 대록 굴리며 생각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레이겐의 웃음도 차츰 잦아든다. 물론 에쿠보가 추측하기에(그리고 아마 그 추측이 맞겠지만) 레이겐은 이미 방금 전의 대화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내린 상태였다.
에쿠보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차라리 이 편이 쉬울 지도 모르겠네.
“데이트 코스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겠지?”
에쿠보가 레이겐에게 물었다. 레이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밥이나 먹으러 갈까?”
“그러던가.”
레이겐이 앞장을 선다. 에쿠보는 잠자코 레이겐의 뒤를 따랐다. 아직까지 레이겐은 귀찮은 얼굴을 벗진 않았지만 최소한 방금 전보다는 경계가 덜했다. 에쿠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밥은 네가 사라, 에쿠보.”
“이 몸은 돈이 없는데. 있을 리가 없잖아.”
레이겐의 말에 에쿠보가 어이없다는 대답을 덧붙였다. 경계가 사라져도 너무 사라졌나? 이건 그다지 좋지 않은데. 그가 생각했다.
“데이트의 제 1법칙은 지갑이야.”
앞서가던 레이겐이 에쿠보의 바로 옆에 붙어 걷는다. 어엇. 그리고 에쿠보가 방심하는 사이 익숙하게 안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주머니를 단번에 찾지 못한 손이 제법 탄탄한 가슴팍을 스쳐 간다. 에쿠보보다 되려 레이겐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았지만, 제법 태연한 얼굴로 지갑을 꺼내 든다.
어이! 에쿠보가 레이겐을 말렸지만 레이겐은 보란 듯이 검은 지갑을 뒤져 천 엔짜리 몇 개를 꺼내어 들었다. 카드를 꺼내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만.
“수업료로 치자고?”
레이겐이 비죽 웃었다. 에쿠보가 항복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어차피 진짜 그의 돈도 아니었다. 물론 이 몸의 주인에게는 조금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만…….
에쿠보는 거기까지는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레이겐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걸음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에쿠보가 흥겨움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저번보다 더 쉬울지도 모른다. 뭐, 그래주면 고맙지. 그가 생각했다.
―
에쿠보는 시게오에게 잠시 떨어져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난데없는 일이었으나 시게오는 역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에쿠보가 시게오의 집에 억지로 붙어사는 중이었으니, 어쩌면 시게오의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일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모텔을 하나 빌려 생활하기로 했다. 남자의 집에서 움직이자니 거리가 거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몸을 옮겨 지내는 방법도 있었으나, 한 번 잡은 몸을 계속 이용하는 편이 나중을 위해 훨씬 편했다.
어쨌거나, 그가 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능력을 쓰기가 수월할 테니까. 물론 이 몸은 뭔가 능력을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실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한 가지 몸에 정착하기로 했다.
뭣보다 피실험자인 레이겐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몸인 게 효율이 좋았다. 친근감을 느끼기 쉬운, 그리고 조금 더 호감을 가지기 쉬운……. 이른바 ‘취향’에 가까운 게 여러모로 이득이니까. 우선 일대일로 진행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뭔가 능력을 써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의 데이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마도 레이겐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겠지만, 에쿠보의 의도대로 데이트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에쿠보는 레이겐과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방법은 레이겐이 먼저 제안하도록 유도했다. 식사에서, 영화를 같이 본다거나, 혹은 산책을 한다거나, 가까운 교외로 나들이를 간다거나.
에쿠보는 늘 레이겐에게 질문을 던졌고, 레이겐 스스로 무언가 하자고 하게끔 만들었다. 레이겐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수업방식에 불만을 표했지만, 점차 그것에 익숙해졌다.
우선 레이겐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돈은 전부 에쿠보 쪽에서 제공했고, 우선 레이겐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후에는 관계에 대해 모든 것을 관여하지 않았다. 레이겐이 하자는 대로 따랐고, 관심을 주었으며, 다정하게 대꾸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에쿠보의 태도에 레이겐이 미심쩍은 태도를 보일 때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데이트잖아?’
그 말이 사실 틀린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에쿠보가 명확하게 제안한 것 또한 데이트였고, 그들은 데이트 중이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 미묘한 선이 있었다.
마치 진짜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굴게 되는, 그런.
물론 시게오가 있을 때엔 달랐다. 에쿠보는 애초에 시게오 몰래 레이겐에게 제안을 한 거였고, 레이겐은 달리 위험이 보이지 않으면 시게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영등등 사무소 내에 시게오가 있을 경우에는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 사이의 거리는 시게오가 없을 때에는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아무 일 없는 척 하기는 쉬웠다.
그러니, 데이트는 둘만 남았을 때만. 어쩌다보니 밀회가 된 거나 다름없었지만 서로 불만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레이겐은 들이는 돈 없이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었고, 에쿠보는 꿍꿍이속을 채울 수 있었으니.
“오늘은 뭐 할까.”
에쿠보가 물었다. 시게오는 진작 집에 간 지 오래였다. 에쿠보가 굳이 시게오를 따라 집에 갈 필요가 없으니 예전에 비해 시간 벌기는 훨씬 용이했다. 적당히 시게오와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기다렸다가 자리를 뜨는 것이 그들이 요즘 들어 자주 택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비밀 연애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혼돈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아직까지는 먼저 발을 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레이겐은 그랬다. 물론 그만두려고 하거든 언제든 그만 둘 수 있을 거였다.
“웬만한 건 다 해봤는데. 영화라도 보러 갈까?”
“여자한테 데이트가 판에 박혔단 소리는 들은 적 없냐?”
에쿠보가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레이겐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쿠보는 장난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란 얼굴이다.
분명 저건 레이겐이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소리다. 에쿠보와 레이겐은 그다지 깊지 않은 수준에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제법 있었다. 대부분은 레이겐이 떠들어 댔다. 그러나 레이겐도 제법 눈치가 빠르고 감출 줄 알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아무런 핵심은 완전히 빠진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도 예외는 있다. 예를 들어 레이겐이 술을 마셨을 때라던가. 홧김에 떠든 이야기를 가지고 저렇게 놀려 대는 것이다.
“그럼 뭘 하자고? 드디어 제안을 하시려나 보네.”
“흐음.”
에쿠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레이겐을 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레이겐이 에쿠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이겐은 에쿠보가 부러 시간을 끄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레이겐의 반응을 간보는 듯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시험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던가. 제법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뭔가 새로운 걸 떠올려 보지 그래, 스승님?”
스승님이라 부르지 마. 에쿠보가 씨익 웃는다. 챙길 것도 없으면서 가방에 이것저것 쑤셔넣는 손이 부산했다. 레이겐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진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섰던 에쿠보가 레이겐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레이겐이 에쿠보의 허리를 쿡 눌러 밀어낸다.
꽤 많이 무너졌다. 경계심이 많이 무너졌다고 해야 하나. 에쿠보는 계획대로 잘 되고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그만 두어도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붙잡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완벽하고 싶기 때문에? 레이겐에 의해 책상 앞에서 서성대며 서 있게 된 에쿠보가 제멋대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간만에 느끼는 인간의 온기도 나쁘지 않았고. 당장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조금 더 느긋하게 굴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레이겐을 놀리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모든 일과 관계 없다는 양 무관심하게 구는 인간을 휘두르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는 언젠가 끝날 이 놀음이 아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데이트에 새로운 게 뭐가 있다고.”
레이겐이 투덜거렸다. 이 몸이라고 알겠냐. 에쿠보가 대꾸했다. 레이겐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에쿠보는 레이겐을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으며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태연한 목소리 톤은 힘이 주욱 빠져 늘어져 있었다.
“스승님께서 더 가르칠 게 없는 모양이네.”
레이겐이 멈칫 멈추어 섰다. 에쿠보는 그런 레이겐을 모른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짐짓 심각한 척 목소리를 깔아 중얼거리는 것이 분명 기분을 나쁘게 만들려는 심산이다.
에쿠보 앞을 스쳐가려던 레이겐이 잠시 멈추어 섰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에쿠보 맞은편 소파에 내려놓았다. 터벅, 터벅. 감은 눈 대신 귀로 레이겐이 움직이는 동선이 보였다. 느릿한 소리가 에쿠보 앞에서 멈추어 섰다. 에쿠보가 눈을 떴다.
레이겐은 조금 오기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쿠보가 팔짱을 끼고 레이겐을 올려다보았다.
“수업하실만한 게 아직 남아있나요, 레이겐 선생님?”
레이겐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은 남아 있었지만, 레이겐은 아주 느릿하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겐은 기껏 입었던 정장 자켓을 벗었다. 에쿠보가 더 이상 빈정거리는 말을 잇지 않아 조용해진 사무실 탓인가, 괜히 신경이 곤두선다.
레이겐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표정은 정리되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은 알지 않아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눈치가 있다면 당연한 소리지.
레이겐이 에쿠보에게 키스했다. 흐음. 에쿠보는 제법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레이겐은 진지하게 인상을 쓰고서 에쿠보의 눈꺼풀을 눌렀다. 에쿠보는 눈을 감아 주었다. 레이겐이 원하는 대로.
딱. 에쿠보가 가볍게 손을 퉁긴다. 불이 꺼진다. 도시의 불빛이 내려와 있는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다. 에쿠보는 레이겐의 몸을 슬쩍 끌어당겼다. 하지만 레이겐은 에쿠보가 함부로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손등을 찰싹 때렸다. 뭐 어쩌라는 거야. 에쿠보가 생각했다.
레이겐의 키스는 엉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능숙하지도 않았다. 어색하게 뒤섞이는 살덩이가 은근한 긴장에 파르르 떨렸다. 에쿠보는 레이겐의 몸에는 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레이겐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전혀 급할 필요가 없다. 레이겐이 먼저, 그의 온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모든 틈을 기꺼이 내어줄지가 관건이었다.
어느 새엔가 벌겋게 열이 오른 뺨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에쿠보는 최소한의 스킨십으로 레이겐의 허리에 손끝을 얹었다. 애매하게 선 자세 탓인가 허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물론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레이겐이 허락할 때에만 진행되는 관계였으니.
하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에쿠보는 그 때에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까지는 밝았던 바깥이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잠시 숨을 몰아 쉬던 레이겐이 아무렇지 않은 척 에쿠보를 쳐다본다. 에쿠보는 얌전히 레이겐이 말하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눈빛은 집요했다. 레이겐이 헛기침을 했다.
“여태 스킨십은 한 번도 안 했으니까.”
레이겐이 말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에쿠보는 팔짱을 꼈다. 젖은 입술을 슬쩍 훑는 혀는 확실히 노골적이다. 결단코 먼저 필요 이상의 손을 대진 않았다. 레이겐은 어정쩡하게 서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연인끼리는 키스 정도는 하니까.’라던가, ‘별 것 아니었잖아?’라던가. 정말, 가르침의 일종이었다는 듯.
레이겐은 자신을 숨기는 데 능했지만, 에쿠보는 레이겐 같은 인간을 꿰뚫어보는 데에 능했다.
“여기서 끝이야?”
에쿠보가 물었다. 레이겐의 얼굴이 훅 달아오른다. 물론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에쿠보는 천천히 레이겐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 함께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분위기 때문이겠지. 에쿠보가 생각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레이겐을 올려다본다. 짙은 검정에 묻은 열기는 예상보다 더 뜨끈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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